내일을 위한 내 일
💬 어렸을 때 초등학생용 진로 탐색 책을 읽던 게 떠오른다. 책 한 권에 한 100개도 넘는 직업이 같이 실려 있고 한 직업에 한 페이지 분량의 설명이 일러스트와 함께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매 학년마다 그 중 하나를 장래희망으로 써서 냈다. 그때는 막연히 언젠가 내가 그 100개 중의 하나의 직업을 고르고, 한 24살쯤(!) 되면 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어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수준의 결말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24살은 한참 지났고, 정식으로 일을 한 지는 1년 좀 넘었다. 내 직업은 그때 읽었던 책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내가 (아직까지는) 좋아하는 일이다. 매일매일 큰 사고나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퇴근하는 게 주 관심사였던 날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3년 후, 10년 후, 55세 이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내가 지금 상태에 만족하더라도, 10년 후에 내가 뭘 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먹고 살고, 하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 일을 찾아낼까?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더이상 어떤 직업도 "결말"이 될 수 없다.
이 책을 고른 건 분명 요즘 그런 질문들이 주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인데, 솔직히 이 책이 질문의 답이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분야도 다르고, (서문에 이건 위인전이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너무 대단한 사람이들이니까! 그럼에도 언젠가 그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시간들이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이럴 수도 있고 이런 길도 있다는 걸 다양한 나이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로 발견하는 것은, 분명 답은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
🔖 정세랑: 쓰다가 막힌다는 말은 글이 문제가 아니라 덜 읽은 거예요. 관련해서 더 많이 읽고 더 자료 조사를 하고 더 많이 사람을 만났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을 때가 막히는 경우가 많아요. 아웃풋이 안 될 땐 아웃풋만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인풋을 조정해야 맞아요.
🔖 엄윤미: 진짜 리더십이 뭔지, 얼마나 다양한 모습일 수 있는지를 알기 전에 여성들이 CEO 트랙으로 가는 길을 일찌감치 차단하는 게 안타까워요.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리더들의 인터뷰를 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조간신문을 읽고 등산을 다녀오고 6시면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해요. 누군가가 나를 돌봐 주고 있고 나는 그들을 돌볼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루틴을, 성공한 CEO는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해 버리는 건 이상한 일이죠.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는 여성들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꿈의 범위가 달라지니까요.
🔖 이상희: 인도네시아에서 토바 화산이 크게 폭발한 적이 있어요. 화산재가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넓은 지역에 오랫동안 구름이 드리우면서 지구상의 식물, 동물이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라고 봤죠. 그런데 인도쯤 되는 지역에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석기 공작소가 발견되었어요. 지구가 내일 멸망해도 나는 석기를 만드는, 그런 느낌 아시겠어요? 눈 떠보니까 나는 살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측 가능한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좋은 교육을 만들기. 인간이 멸종하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멸종은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중생대 지구는 엄청 예뻤어요. 그런데 공룡이 소행성 충돌로 불바다 속에서 죽어갈 때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하지만 지구는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생명체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인간이 '우리가 없어지면 이 세상이 끝나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자만은 없다고 봐요. (...) 우리가 없어진 세상을 준비하기. 그것은 우리가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에요. 인간은 미래를 생각하고 다음 세상을 생각하니까요.